[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늙어가는 길목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지소현 승인 2020-10-06 11:41:46


 

지소현 본지 공동대표.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나는 요즈음 젊었을 때 같으면 화가 났을 일도 그냥저냥 참고 넘어가는 버릇이 생겼다. 좋게 말하면 너그러워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힘이 빠진 것이다. 어느 지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젊어서 바람을 피워 마음고생을 시킨 남편이 중병으로 누워버렸다. 간병을 하는 동안 새록새록 억울함이 솟아올라 갖은 푸념과 모욕까지 주어도 남편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대항할 힘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자신이 더 나쁘다는 뉘우침과 함께 동정심이 일었다고 했다. 화도 힘의 균형이 잡힐 때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의 힘없는 남편의 모습이 나와 같아서 공감이 갔다.


하지만 전의를 상실한 병사처럼 변한 나의 일상은 주변을 화목하게 해서 좋다
.


지난번 일요일 사건이다
. 외출할 일이 생겨 자동차 키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평소처럼 책상 위에 두었는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핸드백마다 뒤집어엎고 서랍마다 찾아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30여 분쯤 집중 탐색을 하다가 외출을 포기하고 세탁기나 돌리려고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모을 때였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아들 녀석 바지를 주워 올리니 주머니가 묵직했다. 혹시 동전인가 하고 손을 넣었는데 애타게 찾던 나의 자동차 키다.


참나
. 밤사이 몰래 어미의 차를 끌고 나다니다니! 보험 가입을 가족용으로 하길 잘했군, 중얼거렸을 뿐 화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사고라도 나면 누구 책임이냐고 불같이 성질을 냈었는데 말이다.


그뿐 아니다
. 춘천의 명소 애막골 시장에서였다. 새벽바람과 싱싱한 채소, 산나물, 제철 과일, 북적이는 사람들 풍경이 좋아서 필요한 것이 없어도 자주 가는 곳이었다, 길을 따라 죽 늘어선 물건과 사람들을 사이를 헤집던 내게 검은 물체들이 바글바글 담긴 플라스틱 세숫대야가 보였다.


오디인가? 오디가 나올 철은 지났는데,.. 뭐지?’ 가까이 가보니 골뱅이 무더기였다. 꼬물꼬물 뒤엉켜 세숫대야 초입까지 기어올라 달라붙은 생명체들이 신기했다. 보기 드문 모습이어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을 때였다. 갑자기 세숫대야를 지키고 앉았던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면서 홍천강에서 밤새 잡아온 것을 사진만 찍으면 재수 없으니 아예 사라고 했다. 순간 난감했다. 골뱅이는 손질법도 모르고 요리는 더욱 할 줄 모르는데 억지로 사다가 무엇에 쓸까나. 흡사 동남아에서 자기를 모델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에게 원 달라를 외치며 손을 내밀던 원주민 같다. 하기야 누군가가 나를 구경거리 삼는다면 기분 나쁜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인권침해도 될 수 있다. 그런 상식쯤은 있는 나다. 그러나 골뱅이만 프레임에 담았을 뿐인데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골뱅이도 초상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처구니없었지만 할머니의 노고가 떠올라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할머니, 제가 골뱅이 요리는 할 줄 몰라요, 대신 그 옆에 상추나 주세요.’ 했다. 시큰둥하니 상추를 비닐봉지에 담아 건네는 할머니에게 많이 파시고 골뱅이도 돈 많이 받고 파세요.’ 최대한 상냥하게 인사했다. 예전 같았으면 할머니! 사진 삭제했어요. 됐지요?’ 짜증 섞인 말로 승패를 가렸을 텐데 말이다. 이러한 나의 너그러움은 사소한 일상 어디서든 나타난다. 좁은 골목 운전 중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주로 내가 후진하여 공간을 만들어준다. 상대방이 비킬 때까지 기를 쓰고 버티던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서 슬그머니 웃기도 하면서...

 

돌이켜보면 나는 몇 년 전까지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쁘게 살았었다. 업무의 완벽을 추구하고 영역을 넓히느라고 시간에 쫓기고, 사람들 눈치를 살피느라고 불안하고, 홀로 기르는 두 아들놈 밥 굶길까 봐 조바심을 냈다. 그러니 정신은 항상 바람 잔뜩 든 풍선처럼 빵빵해서 누군가 톡 건드리면 굴러가고 콕 찌르면 빵 터지는 날들이었다. 따지고 협상하고 적당히 양보하는 척하면서 화를 내는 것도 기본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변한다고 했는데 전리품 없는 전쟁까지 할 힘이 없는 나로서는 죽을 나이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한 심성으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늙어가다 보면 잘 영근 곡식처럼 나만의 향기라도 남으리라. 그래서 힘이 빠져야 할 시기를 어기지 않는 나의 생체리듬이 다행이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