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종일 흐렸다. 밤은 거짖말처럼 구름 한 점 없고 13야 달빛이 낮처럼 밝다.
일교차도 낮 밤이 여전히 크다. 곡우를 지난 후 부터 낮에 햇살이 나면 여름 기온으로 더울 지경이고 밤엔 서늘하다. 아직도 밤엔 난방을 해야 잘 수 있다.
요즘은 전체 난방이 아닌 잘 때만 전기담요를 사용한다. 벌써 4월도 하순이다.
세월처럼 빨리 가는 게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현장학습은 21일, 두 번째 수업을 했다. 한 명이 더 늘어 다섯 명이다. 두 분은 붓잡은 연륜이 상당하고 한 분은 사군자를 해본 경험자다. 또 한 분은 난만 배웠다 했고 가장 젊은 친구는 붓조차 처음 잡아보는 무경험자다. 여성 3명에 남성 2명의 구성이다. 지난 가을에도 경험했지만 5명이 방 두 개에 나눠서 수업하는데 비좁아 불편하다.
수업 날 오전 11시엔 정하선생 부부께서 송석원에 봄나들이 오셨고, 정원의 꽃구경을 하시고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다 가까운 토속촌에 가서 청국장으로 점심을 같이 하는 시간을 가졌다. 송석선생이 전날에 초대를 해서 오셨다. 아파트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시다 모처럼의 부부 외출이라며 즐거운 모습을 보이셨다.
정하선생이 어린 시절 이당 김은호 화백 댁 옆에 사셨고 간송미술관 마당에서 노셨다는 말씀은 들은 적이 있는데 이날 좀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간송과 정하선생 부친 유석조옹과 고교 동창이었다는 것과 정하선생도 간송의 귀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간송은 일제시대 전 재산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신화적인 위인이다.
수업 후 저녁 8시 아버지 제사지내러 후평동 형님댁에 갔고 제사 후 퇴계천길 벽화 작업해놓은 것도 가봤다. 우표모양의 그림 판넬도 부착된 걸 카톡을 보고 알아서다.
현장작업을 한 작가들은 변덕많은 날씨로 유난히 고생을 많이했겠다. 일부만 미완성일뿐 대부분 마무리가 되어있었다. 춘천에서는 춘천미협이 주관한, 초유의 3백미터를 벽화로 채우는 일이다. ‘춘천가는 예술기차’라는 주제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37명의 각 분야 미협 회원들이 참여했다. 덕분에 난감하긴 했지만 모처럼 인물화를 세 점이나 작업해 봤다. 대부분 4~5명씩 협업이라 작가를 밝히진 않는다.
춘천에 명물 하나가 탄생한 거다. 5월 초에 개막 후 시민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23일,어제는 이사할 마을회관 이층에 도배를 새로 했다. 창문 두 개를 보드로 가리고 도배를 하니 공간이 한결 아늑하고 차분하게 느껴진다. 표구사에서 도배사를 보냈다.
방만 얼룩진 곳 부분 도배고 현관부터 작업실로 쓸 공간 전부를 새로 해서 분위가가 한결 밝아졌다. 매일 시간만 나면 거기 가서 한참씩 앉었다 오는 게 며칠째 일과처럼 됐다.
마음은 별다름 없이 그냥 덤덤하다. 집에서 가까워 화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예상은 된다. 천천
히 걸어서 10분 정도, 2천보 거리다. 산막골서 나온 후 옥천화실을 구하고 본격적인 작업은 몇 번 안된다. 못나간 건 코로나19의 영향 탓이 크다. 그나마 작년 가을 문화원 현장 학습 때문에 매주 두 번 씩 3개월을 나갔었다.
산천리 새로운 환경에서 과연 어떤 작품들이 나올지 스스로 기대를 키우는 중이다.
화실에 싱크대까지 한 공간에 있는 건 처음이다. 화장실까지 갖췄다. 최상의 공간이다.
산막골에서 교실 네 칸을 쓰던 건 잊자. 그런 크기를 시내서는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평도 안 되지만 모든 조건이 만족스럽다. 최대한 잘 활용하는게 관건이겠다. 변변한 화실도 없이 걸작들을 탄생시킨 박수근을 떠올리면 산천리 화실은 호사스러울 정도다.
내 생애에 가장 좋은 작품들을 그려낸 곳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그렇게 되도록 할 것이다.
공간의 크기와 건물이 차량 통행 빈번한 길가에 있다는 것 말고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나의 아직 못이룬 독창적 화풍을 여기서 창출해내는 곳으로 만들어 가려한다.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