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 낸 에세이] 인간만이 가진 능력

지소현 승인 2021-08-24 10:41:58


 

지소현 본지 발행인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 강원장애인체육회 이사

) 장애인고용공단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전문강사 ) 강원도사회복지협의회 이사


장애인복지 실천현장에서 일했던 나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끔 만났었다
. 또렷한 의식으로 썩거나 굳어가는 육체를 감당하는 것만큼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또 있으랴. 하지만 그 참담함 속에서도 주변의 사랑 때문에 인간은 고귀한 존재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20
여 년 전에 만난 어느 여성 이야기다. 그 당시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난치병으로 8년째 누워 지내는 환자였다. 한창 활기 넘치던 서른여덟 살 어느 가을날, 감기에 걸린 듯싶더니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며칠 후, 발 감각이 사라지면서 다리가 마비되고 눈이 침침해졌다.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며 알아낸 결과 감기바이러스가 전신 신경계에 침투한 것이라 했다. 병명인즉 다발성경화증이라고. 급기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눈은 아예 멀어버렸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입과 의식뿐이었던 그녀였다.


캄캄한 암흑 속에 누워 지내느라고 욕창이 나고 한 움큼씩 먹는 약의 부작용으로 몸이 붓고 기저귀 독으로 허벅지에는 습진도 생겼다
. 나는 그러한 그녀를 사례관리 업무 차 5년여 동안 방문했으나 단 한 번도 푸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의 주파수를 감사에만 고정한 채 항상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 주제는 주로 자원봉사자들이었다
. ‘어느 교회에서 밑반찬 해 오셨다. 2회씩 빠짐없이 방문 목욕을 시켜 준다. 어느 대학생이 아들의 가정교사 역할을 해 준다.’ 등등 온갖 선행으로 꽉 차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과 깨끗한 이부자리가 그녀의 자랑을 입증하고 있었다. 십시일반이라는 옛말이 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조금씩 시간을 쪼개 이어가는 봉사가 한 가족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제도적으로 도우미를 파견해주지만 20년 전, 그때는 순전히 봉사자들 사랑만이 보호막이었다. 그래서 값없이 치르는 노고들이 더욱 뭉클했었다.


그녀에게는 유일한 가족
, 고등학생 아들이 있었다. 발병 당시 초등교 3학년이었고 고사리손으로 대변 기저귀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도와주는 이들에게 그것만큼은 손대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냄새 나는 배설물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지키고 싶은 최후의 자존심이었으리라.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잔혹성의 최대치인 연쇄 살인범 유OO이 떠올랐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 목숨을 20여 명이나 빼앗을 만큼 심성이 비뚤어짐은 홀어머니 밑에서 보낸 불우한 어린 시절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모두가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마 그도 누군가가 헌신적인 관심을 베풀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동식물도 사랑 앞에서는 잘 자라는데 사람의 자식이니 말이다.


이처럼 개인의 좌절
, 불안, 슬픔, 수치감 등 부정적 감정 치료제이며 나아가 사회 정화제인 사랑!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자랄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고 아예 퇴화해 버릴 수도 있는 숨어 있는 유전자다. 과연 나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가 돌아보니 미약하기 그지없다. 당장 그때 그 여인과 아들도 내 업무가 바뀐 후로는 서서히 멀어지고 이제는 아예 기억에만 있지 아니한가. 내 사랑이 크고 강했더라면 지금쯤 소식 정도는 알고 있었으리라.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는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가 되고 소금이 되는 에너지! 팽배한 물질 만능과 이기주 그늘에서 퇴화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