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소현 본지 발행인
▷강원문인협회 이사, 강원수필문학회 부회장 등 ▷수필집: 지혜로운공존 외 3권
▷강원문화예술인 유공자(문학부문)표창 등 다수 ▷전) 강원장애인체육회 이사
▷현) 장애인고용공단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전문강사 ▷현) 강원도사회복지협의회 이사
결실의 계절이다. 선선한 바람이 따가운 햇살 속을 헤엄친다. 잡초들이 지난여름 싱그러웠던 흔적을 들추며 바스락바스락 울고 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죽을 줄 안다는 진리 앞에 그 누가 토를 달 것인가. 어느 사이 나도 들풀처럼 탄력을 잃어갈 만큼 살았다. 젊어 보이려고 얼굴과 옷차림에 신경을 쓰나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 가여운 노력에 쐐기를 박는 증표까지 생겨버렸다.
2016년 10월 29일, 할머니라는 칭호를 단 것이다. 2015년 여름에 결혼한 큰아들에게서 손주가 탄생했다. 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는데 3세를 보는 순간 내 늙음이 자각되었다. 2.7kg에 불과한 녀석이 나에게 무거운 철(?)을 선물하다니. 쭈글쭈글한 얼굴을 더욱 구기며 우는 녀석이 나를 30여 년 전으로 데리고 갔다. 어쩌면 그리도 내 아들의 첫 모습과 똑같을까. 녀석이 왕사탕만한 주먹을 휘두른다. 마치 대장부의 위엄을 발산하는 것처럼. 신기하고 놀랍고 귀엽고... 오만 감정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아. 정말 할머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할머니라 부르면, 기분 나빠서 못 들은 척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녀석이 ‘할머니’라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불러도 마냥 좋을 것 같다. 천륜이 주는 사랑의 힘이 아닌지.
갑자기 며느리가 가깝게 느껴지고 무조건 예쁘다. 자식 못 낳는 며느리를 타박하던 그 옛날 시어머니들 심정이 이해가 간다. 기묘한 놀이도 생겼다. 아들 내외가 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을 보며 달콤함을 누리는 것이다. 휴대폰은 점차 손주 사진이 가득하고 동영상이 용량을 채워간다. 보고 또 보고... 그래도 부족해 화면까지 쓰다듬으며 ‘정말 신기해. 어느 별에서 왔니?’ 중얼중얼... 인간의 본능 중에 모성애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돌아보면 홀로 고군분투 두 아들을 기른 세월이 감사하다. 물심양면으로 고달픈 긴 시간을 어찌 견디어 냈을까. 큰아들이 중학교 3학년, 작은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부터 나는 홀어미 가장이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두 아들 뒷바라지도 해냈다. 새벽에 일어나 아들들을 깨우고 차에 태워 등교시키고 출근했었다. 퇴근 후에는 야간 대학엘 가고 아들들은 직접 저녁밥을 챙겨 먹으면서 자랐다. 정말이지 슬퍼할 틈도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직장인, 학생, 글 쓰는 사람, 1인 5역의 장애 여성이 바로 나였다. 그 환경에서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친구들 틈에서 허허로웠을 두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 아프다. 그러나 불평 한마디 없이 튼튼하게 성장해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가졌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변명 삼아 패륜이 판을 치는 세태에서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래서 제3세인 손주 탄생이 더욱 감동스럽다.
누군가가 ‘인생의 4계절은 한 번 뿐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있다. 이제 내 삶의 가을 길목에서 폭풍우 속에서 지나온 봄, 여름을 돌아본다. 무사히 견디고 버틴 열매로서 손주 자랑을 마음껏 늘어놓는 푼수가 될 준비를 한다. 늙어 보여도 개의치 않으며, 자유로움을 누리면서 말이다. 아울러 다가올 겨울이 따듯하고 넉넉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