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춘천뿌리전 개막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1-10-26 12:05:37

 


22일 춘천미술관에서 춘천뿌리전이 개막식없이 시작했다. 단체명인 뿌리는 춘천미술의 근원이라는 의미겠다. 회원자격은 만 60세 이상에 25년 이상의 미술활동을 했어야 한다. 목적은 이렇다. ‘본회는 춘천미술의 어제가 오늘의 귀감이 되고, 오늘이 내일의 귀감이 됨을 잘 아는 원로 및 중견 미술인들이 지역 미술을 바르게 정립하여 계승 발전 시키는데 목적을 둔다.’ 올해가 12회째다. 21일 미리 걸어야 하는데 표구사 박사장이 다른 일정때문에 못걸고 개막날 오전 10시 반에 와서 빨리 나오라는 전화를 했다. 혼자서는 작품 배치가 어렵단다. 서둘러 콜택시를 불러 타고나가 21점의 내 작품을 걸었다. 해마다 나이순으로 2명씩 원로작가 2인의 Archive[私的]와 함께라는 작은 개인전이랄까 특별코너전이랄까 그런 전시가 병행되는데 올해는 나와 주운항선생이 대상자가 됐다. 주선생은 서양화로 비구상이다.


작년에도 구상과 비구상이 전시됐었다
. 1층은 회원들 작품이고 2층의 절반씩 공간이 주어져 벽면을 채우다보니 20여점 걸렸다.

 

소품 서간지 작품 홍매도가 12, 죽매도가 1, 백매도 1, 산수화 6, 석난도 1점을 냈다. 매화가 14점이 된다. 산수화 2점도 나무는 백매가 들어갔으니 압도적이다. 화필생애에 25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어떤 의도를 가졌던 게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된거다. 붓을 잡은 이래 가장 많이 그린 소재가 매화였으나 공개 전시엔 거의 내놓은 적이 없었다. 매화는 대부분 요구에 의해 작업했기에 내가 간직할 수 없었다. 가지고 있어야 전시 때에 출품할 것 아닌가. 매죽도 또한 출품이 처음이다. 난도 희귀했던 편이다. 초기부터 꽤 긴 시간 산수화를 주로 그렸어도 산수화가란 말을 못 들었고, 소나무를 선보이며 금방 소나무화가로 지칭되었다.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매화들은 우안 양식이 처음 적용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애당초 작정한 게 아니라 해오던 방식에다 일정한 방법을 곁들인 것이라 어정쩡한 편이긴 하다. 역시 전문가들이라 몇몇 회원은 금방 예전과 다름을 알아챘다. 이렇게 시작하게 됐다.

 

살아오며 나이를 의식하지 않았고 어쩌다 지금 나이를 헤아리면 받아들이기 어설펐다. 그런데 생전 처음 원로작가라는 명칭이 붙으니 그렇게 어색할 수 없다. 장수하는 시대이기 때문일까? 환갑도 드물어 큰 잔치를 가졌으니 70은 오죽하면 고래희[古來稀]라 했겠는가. 이제는 초로[初老]에 해당하는 시대이다.


젊은 시절에
70은 원로작가라는 말이 적절했었다. 어떤 분야든 몇 분 안 됐었다. 지금은 누구도 노인 행세를 안 한다. 80대도 팔팔하게 살아가는 100세 시대여서다. 장수하는 분들이 주변에 흔해서 실감이 난다. 건강하고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모습들이다. 이제부터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스스로 설레기도 한다. 희망사항이기도 할 테다. 이번에 매화 작품들이 주축이 되며 앞으로 반응들이 궁금해진다. 뭔지는 모르지만 좋은 방향이 만들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게 생긴다. 어째서 진작 이런 시도를 안 했었는가 신기할 지경이다.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때가 있더라 이겠다.

 

화필을 잡은지 햇수로 2, 실제 공부한 것으로 치면 1년여 만에 생전 처음 낸 공모전으로 국전에 입선, 그것이 묵매[墨梅]였다. 실제 매화는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 체본에 의지해 공부했을 뿐이다. 그리고 막바지 매화와 비슷한 개복숭아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관찰을 하고 매화에 적용을 해봤다.


입선되며 오로지 매화만 쳐야했다
. 내 경제적 곤궁에 도움이 되고자 선생님께서 지인들께 매화 소품들을 구입하게 주선을 하셔서다. 소품 한 점 건지는데 수 십 장을 그려야했다. 선생님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작품에 엄격하시니 계속 더 해보라 다그치며 적당히가 안 통했다. 산수화 공부와 매화 그리기가 핵심 주제였다. 어느 소재든 물리가 트이면 다른 소재에도 작용을 하며 나아지게 마련이다. 이런 바탕 때문에 매화를 수없이 다뤘지만 이상하게 전시회에는 내놓지 않았다. 그러니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면 내 매화 솜씨를 모른다. 내 최선의 솜씨가 발휘된 매화도들은 아니지만 보는 이들은 새롭게 여길 터이다.

 

소헌선생님께 3년을 사사받았지만 그 기간에 선생님은 대만 초대전과 일본 초대전으로 한 달 이상씩 해외에 머무르셨고, 그 후론 미국 이민 준비로 또한 상경이 잦으셨으니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웠지만 250미터 금수강산도를 그리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게 가장 큰 공부가 된듯 하다.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금수강산전 하시느라 또 화실을 지켜야 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화실을 이어받아 운영할 훈련기간이 되었다.


선생님이나 나나 의도해서 생긴 것은 아니었다
. 덕분에 대만과 일본에서 가져오신 화집 등을 보며 견문을 넓히기도 했다. 그 당시는 희귀해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이다. 잘못해서 야단을 맞은 일이 전혀 없던 것도 돌이켜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만 하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전혀없는 무학력, 어린 나이에 촌무지렁이 아니던가. 더구나 청력장애자였다. 선생님 계실 때 산수화로 백양회공모전에 입선까지 하며 최소한의 화실을 물려받을 자격을 갖추긴 했었다. 모처럼 지난 일을 되돌아보니 꿈만 같이 여겨진다.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