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일기] 동지도 지나고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1-12-28 11:55:14

 


1222일이 동지[冬至]였다.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낮이 가장 짧다는 의미기도 하다.


내일부터는 낮 길이가 노루꼬리 만큼씩이라도 늘어날 터이다
. 동지팥죽을 먹기 위해 삼운사에 들려서 2인분씩 포장해놓은 걸 얻었다. 이 날은 어느 절에 가더라도 묻지도 않고 팥죽을 준다. 포장해놓고 주는 절은 아마 삼운사 밖에 없을 터이다. 공양실에서 먹든 포장을 선택해 집에서 먹든 선택은 자유다. 혼자라면 아예 먹고 왔으련만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니 그렇게 됐다. 귀가하는 길에 반찬가게에 들려 동치미까지 구입해 구색을 맞췄다. 집에 와 전자렌지에 덥혀서 맛있게 먹었음은 물론이다. 동지날을 잘 보낸 거다.


팥죽의 붉은 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
. 달력과 상관없이 동지로 한 해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새날이 시작된다는 인식이 있어서 묵은걸 벗고 좋은 기운을 받고 싶어서다.

 

23일엔 평소보다 좀 일찍 일어나 오음리 단골미용실에서 이발을 했다. 곧바로 석사동으로 가 홍매와 율곡송, 매를 그린 합죽선을 주문자께 전해드렸다. 만족하셔서 다행이었다. 반다지에 쓸 옛 잠을쇠를 종류가 다른 것으로 두 개를 선물로 받았다. 돌아오며 읍 농협에서 내년도 화실 연세를 지정계좌로 입금했다. 오후 2시엔 표구사와 조상님 교지를 십여 장 보관하신 분을 연결해줬다. 두 점은 액자를 하고 나머지는 배접을 새로 해 보관할 것이다. 동지날 저녁엔 서예하는 임여사 부부랑 저녁약속이 있어 화실서 가까운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식사를 하고 화실에서 환담을 나눴었다. 2년 여 만에 만남이다. 미리 약속이 돼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가할 겨를이 없다. 12월 들어서며 합죽선 작업에 몰입해 습작을 여러 장 하느라 여러 날을 소비했었다.


홍매와 율곡송을 작은 서간지에 몇 장씩 쳐봤었다
. 특히 율곡송이 잘 안 돼서 시간이 많이 들었다.

 

추월 남옥선생의 매화시 5언율시와 7언율시를 글씨 연습 삼아 몇 장씩 써봤는데 획수가 많은 글자가 자주 등장해 애를 먹였다. 더구나 평소에 잘 접하지 못하는 한자였다. 일주일 넘게 매일 8~10여 시간씩 화실에서 몰입하다 보니 심신에 피로가 누적되어 고달펐다. 선암사 와송도를 상당한 대작으로 화폭에 담아야 하는데 계속 붓을 못대고 미뤄지는 심적 부담도 커갔다. 년내에 다 마무리하고 싶었기에 더 그랬다. 해가 가기전에 시작이라도 해놓자고 마음을 바꾸고 성탄절과 오늘까지 집에서 쉬었다. 낮잠도 모처럼 몇 시간 잤더니 기력이 조금 돌아왔다. 영하 17도까지 급강하한 강추위도 몸을 움추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초고속으로 흐르는 느낌이 커간다. 이렇게 빠를 수가 없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생애도 순식간처럼 여겨진다.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던가. 요즘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한테 자주 듣는 말이 참 편안해 보인단다. 처음 듣는 말이다.

 

스스로 살펴봐도 살아오며 지금처럼 편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 늘 긴장하고 고뇌하고 속상하고 만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족이 없는데 평안이 함께 할 턱이 없다. 여유와 여지가 없는 삶이었다.


무얼해도 밑바진 장독마냥 채워지는 게 없었다
. 나름 최선을 다해왔건만 그랬다. 안간힘을 써왔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70년을 살아왔다. 죽음과 늘 가까이 했던 어린시절이 있었고 건강이 찾아오자 극심한 가난과 벅찬 노동에 시달려 10대 중반에 청력상실을 겪었다. 삶은 끔찍했고 실날같은 희망도 안 보였다. 주어진 운명이었던지 그림에 빠져들며 빛을 봤고 50여년동안 화필을 놓지 않았다. 평범하진 않았지만 뛰어난 기량도 못 펼쳤다. 오로지 꾸준한 노력형이었다.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덕분에 부족함을 채워가며 성장할 수 있었다
. 10대에는 30까지만 살면 많이 살 거라고 근거 없는 예측을 했었다. 누구나 병약한 모습을 보고 단명할거란 말을 많이 들었기에 가졌던 생각이었겠다.

 

손톱 끝만한 연결고리도 없이 소헌선생님 문하에 들어갔고 학원비 면제는 물론이고 지, , 묵까지 받아서 공부를 했다. 강촌서 화실을 오가는 기차는 대부분 몰래 무임승차를 했고 남춘천역서 요선동까지 걸어다녀도 나는 듯 했다. 점심은 굶었다. 통학기차로 화실에 나오고 막기차로 귀가를 했다.


시계가 없으니 막기차를 놓치면 한 겨울에도 강촌까지
30리길을 걸어갔다. 절반이 강변길이니 얇은 옷에 강바람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어 견뎠다. 돈벌이 노동이 있으면 그나마도 몇 달 씩 못 나갔다. 노동을 하면서도 선생님 당부처럼 머리속으로 끊임없이 그렸다. 73년 구정 지나고 입문해 화실에 나간 날보다 빠진 날이 더 많은 공부로 7423회 국전에 묵매를 출품해 입선을 했다.


내 생애 최초의 상장이다
. 74년 여름 산수화로 백양회 공모전에 입선, 7511월에 소헌선생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며 화실을 물려받았다. 그렇게 내 삶의 차원이 바뀌며 오늘까지 와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