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대한도 지나고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1-28 10:31:56

 


지난 120일이 가장 춥다는 대한이었다. 음력으로 치면 신축년의 마지막 절기이기도 하다.


19
일에 가장 추울 때 생긴 수난에 다름 아닌 집의 상수도, 난방보일러도 해결되어 5일간의 시련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공사하는 중에 눈이 내려 제법 멋진 설경을 펼쳐놓기도 했다. 이제 입춘을 기다리는 마음이 설레기까지 하다. 하루가 다르게 추위도 누그러지고 벌써 봄기운으로 착각을 할 정도로 기온이 오른다. 오후에 뽀드득대던 눈길이 밤 11시 넘어 귀가하는데 녹아서 질척댔다. 푸근한 기온으로 다음 날엔 눈의 흔적도 안보였다. 이런 식이다. 아직 한 두 차례 추위는 더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한참 기다려야 하는 입춘을 입에 올리며 봄이 멀지 않았다고 약간 들뜬 마음까지 든다. 좀체로 풀리지 않는 숙제에 끙끙거리면서다. 처음인 경험이겠다.

 

순천 선암사 와송이 숙제다. 가로로 긴 대략 80호 크기의 대작으로 그릴 작정인데 종이를 재단해 화판에 붙여놓고 한 달을 넘게 시작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몇 차례에 걸쳐 현장을 보고 스케치한 것도 여러 장이다. 그럼에도 좀체로 작업 전에 어떻게 표현할지 가늠이 안잡히는 경우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며칠 씩 고심하는 것이야 비일비재하나 한 달을 넘기며 아직도 상이 잡히지 않는 건 참 이례적이다. 와송 자체가 누운 부분의 가지들이 뚜렸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특성을 가지긴 했다.


화폭의 절반이 그런 상태가 된다
. 뿌리 쪽엔 샘이 솟는 작은 못이 있고, 중간 줄기부터 잔가지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좀 방만한 상태랄까 집약되어 있지 않은 형상이다. 선암사의 또 다른 특질인 매화도 와송에 곁들일 구상이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화면에 변화를 주고 싶은 욕심도 작용한다.

 

언제까지 꼭 해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압박감이 안드는 것도 한 요인일 테다.


그러나 이걸 끝내야 남옥선생 매화시를 바탕으로 매화도 연작을
40여점 이상 해내야 할 작업이 기다리고 있음이다. 이 또한 안일하게 습관적으로 쉽게 해 낼 성질의 작업이 아니다.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새로운 시도를 과감히 해보고 싶어진다. 화필생애에 매화를 끊임없이 쳐왔지만 대부분 소품을 즉석에서 해주는 식이라 전력을 다한 작품은 아주 희소한 편이어서 늘 아쉬웠었다.


그랬기에 전시 발표도 드믈었다
. 화필을 잡은 후 첫 입선이 국전에 묵매도였다. 초기엔 오로지 매화만 몇 년간 많이도 그렸다. 그 다음 해부터 산수화로 각종 공모전에 인정을 받았지만 요청은 매화에 집중됐었다. 화필생애 50년 되는 해에 매화로만 개인전을 할 계가가 만들어졌으니 뜻한다.


되는 일도 아니다
. 혼자만 되새기는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음이다. 매화와 인연이 깊기만 하다.

 

운명처럼 화가의 길로 들어선 이래 온갖 시련을 겪었어도 후회하거나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의욕이 샘솟았다. 나태하거나 권태는 없었다. 끊임없이 그릴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픈 심정이다. 병약하게 태어났음에도 심근경색으로 두 번의 수술을 한 것 말고는 크게 아픈 일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경제적인 여유를 가져보지 못한게 아쉬울 뿐이겠다.


생활에 곤욕을 치룰 정도는 아니지만 늘 조금은 모자르고 부족한 환경이었다
. 그럼에도 개인전을 끊임없이 치렀고 로마에서 국립동양박물관 초대전까지 가지며 36일을 머물고 유적과 교감했다.


중국 길림성 장춘에서 강원도 예총대표단으로 방문해 공식적인 휘호 석상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경험은 소중했다
. 화실이 문화사랑방 역활을 하며 외롭지도 않았다. 늘 좋은 사람이 많기도 했다.

 

가평읍내서 출생, 초교 5년까지 병약속에서 살고, 갑자기 가세가 기울며 가평 북면으로 이주, 수해로 밤나무 위에서 생사가 급박함을 경험하며 처음 겪는 농사일에 힘겨움과 영양실조로 청력상실, 원주 태장동에서 한겨울을 지내고 춘천 강촌으로 와 노동판과 집의 땔나무를 해대며 암흑의 시기, 민박 손님의 주선으로 파고다공원 옆 빌딩에 있던 월간 만화왕국사에 들어가 수습 3개월만에 귀향, 귀향하며 처음 국전을 관람했고 황홀했다. 우여곡절 과정을 거쳐 묵촌회에 입문해 화필을 잡고 1년만에 국전 입선, 다음해 백양회공모전에 산수화로 입선, 그리고 선생님의 미국 이민으로 화실을 물려받았다. 집도 소양로2가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화실 이사만 대충해도 17차례가 넘는다. 결혼했고 남매를 뒀다. 27년간 묵촌회 운영, 그리고 첩첩산골 산막골생활 꽉채워 19, 다시 춘천 근교 신북읍에 자리를 잡았다. 일관되게 살았지만 삶의 안정은 별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