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4월의 끝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5-03 10:57:59

 


마지막 날까지 밤이면 온기가 그리워질 정도로 낮은 기온이 계속된다. 그렇다고 난방을 하기도 애매하다. 더러 좋은 날씨엔 전형적인 봄날의 온화함이 감돌지만, 바람이 부는 날도 많아서 참 적응하기가 난감했다. 어떤 옷을 입어야 적절한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희한한 봄이었다.


시간은 또 왜 이렇게 쏜살같이 가는지 당황스러울 정도다
. 27일 문화원 한국화반 3번째 수업을 했다. 참석자는 4, 5명 전원이 아직 수업해보지 못했다. 공부하는 분들은 수업시간을 초과할 정도로 성실하다. 문화원에서도 담당 직원이 나와 점검을 하고 수업하는 모습을 찍었다. 28일엔 국립춘천 숲체원 대회의실에서 추월 남옥 기념사업회창립총회가 오전 10시에 있었다. 참석자들은 발기인대회 때 인원보다 조금 더 많았다. 현곡시인이 석주시인과 최이사를 시내서 먼저 태우고 수겸초당으로 왔다. 7시 반경 일어나 여유있게 머리도 감고 커피도 마시며 기다렸다가 동승, 참석할 수 있었다.

 

기념사업회 출발을 축하해 주듯 날씨는 쾌청, 바람도 없고 따듯해 4월중 가장 좋은 날씨였다. 신록이 눈부셨다. 가장 아름다운 때다. 며칠만 지나도 초록연두색에서 녹색으로 바뀌면 신선미가 떨어진다.


개회는
30여분 늦어져 10시 반에 시작했다. 식전공연으로 현곡시인의 환생축시로 시작해 소지영 명창의 분매가창작곡이 불려졌고, 민성숙 성악가의 매향심취독창이 있었다. 창립총회는 발기인대회 때와 유사하게 진행되고 김준해 준비위원장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6월에 있을 내 매화전도 언급이 됐다.


짐이 무겁다
. 과연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서다. 아직도 생각하는게 많고 본격적인 붓을 못잡고 있는 상태이다. 회의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외로 요양원 같은 곳에서 단체로 나들이를 나온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많았다. 이분들에겐 숲체원 환경이 천국이겠다.


집에서 걸어가긴 좀 멀지만 숲체원은 같은 발산리에 있다
. 남옥선생 묘도 이곳에 있으니 인연인 것인가.

 

최이사가 동행을 하면 전직 신문사 사진부장이었으니 사진을 많이 찍힌다. 드론 촬영까지 한다. 작별 후 오래 전 사진들을 폰으로 전송해줬다. 3. 40년 전 것이라 흑백사진도 있다. 모두 귀한 사진들이다. 30대 시절, 무위당선생님께서 내 개인전을 보러 원주서 오셨다가 같이 찍힌 흑백사진을 보니 감회가 뭉클하다. 보고 들은 것 없던, 초졸 학력에 청력장애자로 막노동과 겨울이면 나무꾼이던 강촌 촌놈이 20대 초반, 시내 중심가에서 화실을 하며 각계각층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만나고 적응을 한 것이 참 신통하단 생각도 든다. 국전, 백양회 공모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에서 계속 인정을 받았으니 당당하기도 했다. 강원미술대전에선 금상, 특선, 동상을 받았고 최초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신들린 듯 붓을 잡았던 시절이었다. 작업에 미쳐서 며칠씩 잠을 안 자는 건 흔했다. 서점엔 문턱이 달토록 드나들며 지적 허기를 메웠었다. 보청기 없이도 어떻게 적응을 해갔다.


주변의 깊은 이해와 배려 덕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 안정되며 보청기까지 낀 후론 날개를 단 격이다.

 

절친인 친구 말대로 나와 소통하기 위해선 목소리를 최대한 높여야해 대화를 하고 나면 목이 아풀 정도였단다. 어디 이 친구만 그랬을 것인가. 당시엔 그런 배려를 느끼지 못했었다. 치열하게 사느라 여유를 못 가졌었다. 그것이 뭐든 가릴 것 없이 허허롭고 텅 빈 내 속에 채워넣기 바빴으니까. 지적 허기가 심했다.


일분일초
, 단 한순간도 방심이 없었다. 늘 긴장 상태였달까. 정신은 활짝 깨어있어야 했다. 아리랑박사 박교수가 가정교사처럼 세상만사 가르치는 역할을 자청해서 해주기도 했다. 당시엔 시어머니 같아 잔소리로 여길 때도 많았지만 감히 내 처지에선 반발도 못해봤다. 강의 시간 말고는 화실에 상주하다시피 했었다.


최상급의 사회생활 지도사였다
. 평범한 교수가 아닌 처세에 밝으며 만물박사 격인 분이어서다. 국문학 전공에 분재, 수석, 서화, 골동까지 다 밝았다. 군 시절 부대장이나, 교육계에서도 도교육감을 수행했었고, 기자까지 한 이력이 있다. 내 미숙함을 많이 가려주는 역할도 해줬다. 당신에게 유익함이 더 많아서도 있다.

 

태어나면서 몸이 병약해 어릴적엔 앓으며 병원 다닌 기억밖에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등교보다 결석이 더 많았었다. 아파서 밥먹듯 결석을 했다. 그랬기에 공부하란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러니 성적은 꼴지에서 맴돌았다. 4학년부터 건강이 나아지며 출석이 더 많아졌지만 특이한 용모로 전교생의 놀림감이었다. 어른들이라고 내 별난 모습에 다를 것이 없었다. 형과는 극과 극이었다. 형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었다. 성적은 물론 체육이며 웅변, 미술까지 만능이었다. 학교에 강당이 없던 시절이라 읍내 영화관에서 학예회를 했고 연극의 주인공을 맡았었다. 형의 수많은 상장이 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내겐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소헌선생님과 연결이며, 남천선생님과도 형이 길을 열어줬다. 첫 길만 열어주면 내가 잘 해나갔다. 사사받으며 야단 한번 받은 적이 없던 것도 신기하다. 오죽하면 어머니까지 내게 멀대장군이라고 하셨을까 매사에 똑 부러지질 못하고 어리버리한 성격이었음에도 두분 다 내게 칭찬까진 안하셨지만 화를 내신 바도 없었다. 귀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