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5월의 풍경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5-17 11:50:30

 


논을 써래질한 걸 보고 곧 모내기가 있겠다 예상은 했는데. 이틀 화실에 안 올라간 사이에 벌써 몇 몇 논엔 모내기가 되어 있었다. 모든 걸 기계로 하는 시대라서 사람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논가에 모여 앉아 지나는 사람까지 붙잡아 같이 모밥 먹던 인정 넘치던 추억은 끝났다
.


아카시아 꽃이 만발해 뚝방길이 풍성하다
. 아래쪽은 아기똥풀 노란색이 뒤덮이고 허공엔 흰 빛의 아카시아 꽃이 곱다. 몇 송이 따서 입속에 넣는 즐거움도 누렸다. 화실 주변 호밀밭은 소먹이로 쓰이는데 이삭이 팬 상태로 베어졌다. 순환이 참 빠름을 느낀다. 산촌에선 못 느끼는 들판의 정서이기도 하다. 오월에 들어서도 일기가 고르지 못하고 변덕의 연속이다. 밤엔 아직 전기담요를 사용해야 하는 저기온이다. 낮도 초여름같다가 바람이 많다가 흐리고 맑고, 하루도 일정한 안정된 모습을 안보인다. 변덕꾸러기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자연의 운행은 정상이다.

 

11일엔 문화원 한국화반 두 번째 수업이 있었다. 역시 4명 참석, 계속 결석하는 한 분은 홍성에서 이사왔는데 아직 정리가 안 돼서 못나온단다. 마무리하면 수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 수업이 끝난 후 내게 금일봉 봉투를 줘서 받았다. 수업은 굳어진 틀을 깨는데 중점을 두고 진행된다. 닦아온 연륜들이 있어 필력은 부족하지 않건만, 체본이란 틀에 억매여 있어서다. 10여 년을 붓잡은 성실한 분들이라 체본에 충실하고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모범생으로 그런 점이 칭찬을 받아왔겠지만, 참된 공부 방법은 아니다. 원리와 기법을 이해하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이해시키고 설명해주다 보면 3시간이 금방 간다. 산수화, 소나무, 난초 입문자, 문인화 등 각각 다르다. 모두 선하며 성실한 성품을 가진 중년, 노년들이다.

 

13일에야 추월 남옥선생의 매화시 40수를 제대로 훑어볼 수 있었다. 이제 발동이 걸렸다는 거다.


과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부딪치며 돌파해야 한다
. 여러 생각들이 충돌하고 있다. 분명한 건 이번에 진일보한 세계를 펼쳐낼 수 있을거란 의지가 꿈틀댐을 느낀다는 것이다. 가장 큰 장애는 작업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5월 중에 40점의 매화를 쳐야 한다. 아직 완성작은 1점도 없는 상태다. 이미 절반을 구상이며 준비로 보낸 상황이다. 그럼에도 청사진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믿는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축적된 역량뿐이다. 매화라는 단일 소재로 다양한 구성과 풍부한 표현을 뽑아내야 하는 과제를 받았다. ‘분재 매화라는 제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남옥의 매화시가 제시하는 정서도 반영해야 한다. 자유롭지 않은 족쇄다. 그럼에도 승화시켜내야 한다. 남옥 시를 벗어난 선암매, 김해 와룡매, 대작 매화도 구상하고 있다. 최선을 다하련다.

 

매화를 화필 생애 초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쳐왔지만 집중해서 연구하거나 연습은 초기 3년 정도 말고는 없었다. 8폭 연결 병풍도 여러 벌 쳤었던 기억이 난다. 묵매로 국전 입선하며 오로지 매화 일변도였던 초기 시절이다. 실물 매화를 처음 접한 건 몇 년 후 선물로 받은 분재 매화를 통해서다.


실제 매화를 광양매화마을이며 김해 와룡매
, 선암사, 백양사 고매를 다니며 접한 건 산막골 들어간 이후가 된다. 수십 년을 관념화된 매화가 축화며 즉석에서 해줘야 하는 작품이 되었다. 매화에 빚을 많이 졌다. 매화 소재는 내게 운명적인 인연이다. 도산서원에서 스케치한 매화와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가 관념화를 벗어난 첫 작품이 된다. 목마름처럼 언젠가는 매화만 가지고 개인전을 하고 싶다는 구상은 늘 가지고 있었다. 계기가 갑작스럽게 왔다.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서다. 제작 기간이며, 분매라는 거며, 시를 기둥 삼아야 하는 거며, 이 모든 걸 극복해내야 한다. 운명이고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