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매화를 치며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5-24 11:20:49

 


518, 한국화 수업은 두 명만이 출석, 한 분은 다리부상으로 기브스를 했다 하고 빠진적 없던 또 한 분은 집안의 급한 일로 결석, 그럼에도 수업은 더 길어져 두 시간을 넘겨 세 시간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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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엔 삼 개월에 한 번씩 가는 병원 정기진료일이라 아침 7시 반에 가서 식전 채혈, 아침을 먹고 두 시간 뒤에 재채혈 후 담당 홍과장님을 만났다. 그 사이 병원 분위기는 많이 바뀌어서 체온 측정도 없고, 채혈을 기다는데 번호표를 뽑는 게 아니라 새로 설치한 전자기기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면 이름이 찍힌 표가 나왔다. 시스템이 바뀐 거다. 병원 현관 회전문은 정지시켜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검사 결과는 별 이상이 없어 똑같은 약을 처방받았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혹시나 해서 늘 긴장을 하게 마련이다. 커피 마시는 것만 하루 분량에서 두 잔 정도 줄였으면 하는 권고를 받았다.

 

아침 식전, 식후에 한 잔, 점심, 저녁 식후, 그 사이에 또 한두 잔씩 마시니 커피믹스로 평균 7, 8잔을 마신다. 식사 외에 뭔가를 섭취하는 건 커피 밖에 없다. 밤샘 작업을 할 때는 맘모스빵을 반쪽 정도 먹는다. 근래엔 식간에 출출해지면 초코파이도 한 두 개씩 먹기도 한다. 식전에 거르지 않은 또 하나가 사과 한 개를 꾸준히 먹온 지 여러 해가 된다. 사과를 먹어온 이후부턴가 정기진료 때 별다른 검사를 거의 안 받은 편이다. 특정 식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산막골서 19년을 지내며 평소에 지닌 성격에 더해 문화와 문명이 열악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긴 습관이기도 하겠다. 욕구가 있으면 충족시킬 방법이 없었으니까. 구멍가게 하나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담배만 안 떨어지면 됐다. 인터넷이 되면서 세상과 소통은 시내 때 보다 오히려 범위가 훌쩍 더 넓어졌었다.

 

추월 남옥선생 매화시와 인터넷을 통한 분매를 골라 스케치하고, 영주매화분재원과 주변에서 찍은 사진 등을 토대로 쳐내는 매화도가 꽃은 안 단 상태로 계속 몇 점씩 축적되어 가고 있다. 홍매라면 작업이 좀 단순해 지는데 백매를 위주로 할 생각이라 호분[胡粉]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손이 더 많이 가기에 그렇다. 시에도 꽃봉오리가 처음 맺히기 시작할 때부터 반개된 것, 활짝 핀 것, 시들어 가는 것, 낙화된 모습들로 나뉘어져 있음이다. 40수 중에 대다수가 시들어가거나 낙화되는 모양을 읊었다.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모습을 노래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특이한 경우가 된다
. 둥치와 가지는 영향 받지 않으니 우선 먼저 작업해 놓는다. 시에 따라 꽃다는 방식만 조정하면 된다. 모두 번거로움 덩어리들 이다. 등걸과 가지도 분재 매화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으로 감상자 배려도 해야 한다.

 

동양화, 근래에는 한국화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서양화의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같이 한국화에도 산수화, 문인화, 인물화, 기명절지화 등 여러 분야가 있다. 대개 배우는 시작을 문인화에 속하는 사군자로 부터 출발하는 게 보편적이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묶어 말한다. 매화는 봄, 난초는 여름, 국화는 가을, 대는 겨울을 대표하며, 난은 곡선, 대는 직선, 매화와 국화는 곡선과 직선을 아우른다. 대체로 배우는 순서는 곡선인 난초에서 출발해 직선인 대나무, 국화와 매화는 가르키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기량과 취향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다. 사군자를 잘 구사하면 다양한 소재로 전개되는 문인화를 익히고 인물화로 나아가며 최종 목표는 산수화가 된다. 인물화는 비교적 다루는 작가가 적은 편이다. 먼저 배우는 난초가 좋은 작품하기엔 가장 어려운 편이니 아이러니다.

 

내 경우는 난, , , 매 순서로 배웠고 그중에 매화가 취향이 맞았는지 가장 솜씨가 나았다. 2년을 소헌선생님 문하에서 수학하며 막일을 다니느라 절반도 못나왔으니 겨우 기초만 시늉하는 정도로 축적된 게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권유로 공부하는 빌미로 삼아 국전에 도전을 매화로 했다.


국전 관람은 화실에 나오기
2년 전, 22회 전시를 경복궁에서 봤던 게 유일했다. 규모와 솜씨들에 압도당했었다. 감히 입선은 꿈도 못꾸고 몇 차례 도전하며 기량이 늘면 가능성이라도 높아질 거란 생각이었다. 국전도록이 시립도서관에 여러 권 있어 빌려다 보고, 개자원화보의 매화를 기초부터 다시 해보며 막바지에는 야생 복숭아나무를 관찰하며 체본 없이 두 달 여를 푹빠져 붓을 잡았다. 작품이 크니 배우는 사람이 없을 때만 연습이 가능하며 막바지엔 주로 밤샘을 했고, 기적 같은 입선을 했다.

 

그때까지 어떤 공모전이든 출품한 적이 없고 상이란걸 받은 일이 없었다. 그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국민학교
4학년부터 서예교과서가 나왔고 서예부에 들어가 붓을 잡은 건 왜인지 동기가 뚜렷하지 않다. 아버지가 더러 집에서 족보 같은 걸 쓰시느라 붓잡는 걸 봤던 영향으로 여겨진다. 흥미가 있어 서예부엔 충실히 참여했던 편이다. 그리고 교내 미술대회에서 가작을 받은 게 유일한 상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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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때 시골로 전학을 가서도 서예가 담임선생님 눈에 띄어 학교 대표로 군대회에 나갔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리곤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농사일이며 막노동을 하며 영양실조에 과로가 겹쳐 청신경이 망가져 장애가 생겼다. 가족 누구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스스로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인 채 살아냈다. 그후 결혼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고서야 알게 된 것이다.

 

보청기도 그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상을 받은 경험이 없으니 국전 입선 후 부족한 실력을 잘 아는데 어찌 감당할 수 있나 심각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었다. 기쁨은 고사하고 겁이 덜컥 나서다. 잠도 못잤다. 그러길 일주일이 넘어서자 집에서도 침놓는 동네 어른을 모셔와 침을 몇 방 맞고는 그대로 혼절하듯 내리 사흘 동안을 잤다. 그리고 일어나니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내 힘으로 한 거 최선을 다하자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화실에 나가니 난리가 났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내 주소도 몰랐으니까. 신문사에서 취재가 오고 6단 박스기사가 나왔다. 축하가 이어졌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소품 한 점 하는데 수십 장, 백여 장까지 해서 한 점을 골랐다. 선생님의 엄격한 훈련이었다. 산수도 시작했고 그 다음 해엔 백양회공모전에 산수화로 입선을 했다. 공부가 짧았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