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별난 일들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7-19 10:48:27


 

7월 들어 13, 두 번째 한국화 수업 날엔 폭우가 여러 시간 쏟아져 수업이 안 될 줄 알았다. 그래도 알 수 없으니 화실에 올라갔다. 한 분은 갑작스런 휴가로 또 한 분은 역시 악천후라 결석한다는 문자가 왔다. 지난 두 번을 결석한 정선생이 그래도 수업을 받자고 출석을 했다. 화실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작용도 했겠다. 문화원 직원도 폭우를 뚫고 수업 중간에 와서 현장 확인을 하고 갔다. 이런 악천후엔 전화로 확인해도 됐을 텐데 직분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발산천이나 화실로 올라가는 길옆 산천천이나 모처럼 수량이 늘어나 바닥이 안 보이게 키 높이로 자라 개울을 뒤덮은 수초들을 물 기운으로 눕혔다
. 작년에도 못 보던 모습이다. 물 빠짐이 좋아 금방 늘고 금방 줄어든다. 큰 길보다는 산천천을 따라 걷는 뚝방길을 이용해 화실을 오르내린다. 천천히 걸어서 대략 15분 정도 거리다. 길 옆은 논과 밭, 작은 사과과수원도 하나 있다. 이 똑방길에 지난 달, 10년생 소나무들을 가로수로 심어놔서 마음이 흐뭇하다. 내 팔뚝 굵기에 키가 3미터 정도 된다. 길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새 뿌리가 건강하게 정착해 새순까지 왕성하게 내밀고 있는 중이다.

 

15일엔 문화예술을 애호하는 분들이 오후 5, 산천화루에 왔다. 내 삶과 예술에 대해 듣고자 해서다. 18명이다.

중년 남녀들로 남성은 4, 여성이 절대 다수였다. 내 생애에 처음인 경험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내 전시를 본 분도 두어 명 있었다. 화실에 걸려있는 작품들을 설명해주고 몇 가지 질문에 답한 후 내가 그림에 입문한 과정부터 작업해온 변화를 1시간 동안 대충 이야기해줬다. 화실이 방이라 모두 바닥에 앉고 나만 의자에 앉아서 진행, 좁지도 넓지도 않은 알맞은 공간이었다. 끝나고 남촌막국수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고, 진행자와 화실에 올라가 내 책 한 점의 생각, 솔숲에 들다를 가져와 기념으로 한 권씩 줬다. 그리고 맥국터 비가 세워진 곳을 비롯해 왕궁터 왕뒤길을 답사, 내 집 발산초려는 담 밖에서만 보며 모임이 끝났다. 강연료도 내 계좌로 넣어준다고 했다. 집에 들어와서야 언제부턴가 핸드폰을 안들고 다닌걸 알게 됐다. 단체가 오기 직전까지만 떠올랐다. 10시경 가을이 데리고 화실에 올라가 둘러 봤는데 없었다. 동선이 단순한 하루였기에 저녁을 먹은 식당과 화실 말고는 핸드폰을 잃을 곳이 없지 않은가.

 

16, 오후 6시경 걸어서 남촌막국수에 가서 확인, 핸드폰을 보지 못했단다. 결국 화실을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다.


곧장 화실로 올라가 내가 앉아 이야기하던 옆 정리장을 보니 삼단 중 맨 윗쪽에 있는 것이 보였다
. 물감이며 여러 잡동산이를 모아 놓은 정리장이라 거기에 핸드폰을 놓아본 적이 없었기에 어제는 평소 놓던 곳만 살폈었다. 그러니 못 본거다. 화실에 들어가자 바로 찾았으니 됐다. 이야기 하느라 앉았던 의자 옆이 된다. 핸드폰보다는 케이스 안에 함께 있는 현금카드가 더 걱정이었다. 핸드폰이 없으니 그 답답함이란 고립된 섬으로 느껴졌다. 딱 하루 24시간가량 핸드폰 없이 지내며 참 막막했었다. 모든 것들과 단절됐었다. 절대 필수품인 걸 새삼 각성하였다. 혼자만 끙끙 거렸다. 나이 탓인가, 그 와중에도 안절부절 하거나 평정심은 잃지 않았다.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느긋했다. 예술애호가들과의 만남도 무슨 절차나 방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어서 즉흥적이었고 긴장을 했었다. 그리고 저녁식사와 이어진 어둠속의 동네 답사까지 여유를 못가져 핸드폰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니 별난 일들이다.

 

70여 년의 생애를 살아오며 성인이 된 후 맞닥뜨린 위기로는 1997년 강원도 예총 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길림성 장춘을 방문했을 때였다. 평생을 살아오며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못했었다. 현지에 가서야 일정 중에 그쪽 서화가들과 휘호하는 행사가 있는 걸 알았다. 화가는 나 한 사람이다. 원래는 서예가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갑자기 빠졌기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극도의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국내라면 도망이라도 갈 텐데 중국어도 모르고 진퇴양난이다. 행사장은 영빈관, 휘호대는 모두 새 천으로 바꿔놨고 길림성 예총 각 분과 대표들이 몇 십 명 둘러앉았다.


우리는 배단장
, 엄시인, 신무용가에 나까지 4,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개석상에서 붓을 잡는 일은 처음이다. 그들 말대로 서화분야는 중국이 극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에랴. 중국땅에서 내 능력이 검증받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결과는 기대 이상의 호평을 받았다. 대우가 공식적으로 달라졌다. 머리카락에 글씨를 쓴다는 사람의 전각을 4과나 받았고 제백석의 제자인 길림대 미술과 원로 이외[李巍]교수한테는 30호 크기 호랑이부부 작품을 받으며 극찬을 들었다.

 

두 번째는 2008년 이탈리아 로마 사피엔자대학 대강당에서 수백 명을 앞에 두고 시연을 한 일이다. 누구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 몰랐다. 한국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연을 할 거였는데 학생들이 몰려들어 소강당에서 중강당, 결국 대강당으로 바뀌며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으로 꽉 채워졌다. 우리측 통역이 나서고, 그쪽 이탈이아인 미대교수가 해설을 해줬다. 산막골 일상생활을 찍어간 동영상도 보여줬다. 로마에서도 가능했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어떻게 감당을 했는지 지금도 떠올리면 아찔하고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 이런 일을 겪었다고 나아진 것도 없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어려워 피하고 싶어진다
. 태어나면서 부터 머리가 기형이라 따가운 시선을 받았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전교생의 놀림감이 됐다.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학교가기 싫었다. 3학년까지는 병약해 출석보다 결석이 더 많았으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꼴지에서 맴돌았다. 내 바로 위 형과는 정반대 성향이었다.

 


형은 늘 우등생이고 못하는 게 없는 만능인이었다
. 남 앞에 나서는 일에도 능숙했다. 극과 극이 따로 없는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