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흐름의 변화들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2-07-26 11:28:52


 

719, 달샘이 왔고, 잊고 있던 저녁모임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장소는 구봉산에 있는 파스타 전문점이다. 안사람들은 봄에 한 번 모였고, 이번엔 부부 동반이다. 지난 번, 이번 모두 홍여사가 내는 것이다. 자리를 함께한 이들 모두 정이 깊다. 네 쌍 중 한 분만 바깥양반 사정으로 혼자 참석. 오랜만의 만남이라 많이 반가웠다. 산막골 있을 때부터 가끔 모였었다.

 


부귀리나
, 상추곡, 시내이기도 했다. 하는 일들이나 나이가 달라도 상관없었다. 모이면 잘 통하고 좋았으니까. 어쩌다보니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난 해부터 최근까지 함께하는 일이 좀 뜸했었다. 다음 달에는 내가 자리를 만들겠다고 미리 언질을 했다. 부귀리에서도 적당한 날을 잡아 따로 여름 보양식을 준비하겠단다. 이런 식으로 무리 안 하고 자연스럽게 정을 나눈다. 어떤 인연이 작용하는 것일까. 삶의 미묘함이란 살아오며 궁구해 봐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음이다.

 

20, 문화원 한국화반 수업, 신선생과 김여사가 출석을 했다. 정선생은 전전날 친구모임 참석 후 몸의 이상으로 전 날, 검사를 받았는데 양성 판정이 나왔다며 전화로 알려왔다. 정원 5명이 출석한 건 수업 첫 날 뿐인 듯 하다. 홍성에서 춘천으로 이사 온 분은 첫 날만 나오고는 계속 결석, 가장 열성인 분은 다리 뼈를 다쳐 깁스한 상태라 안타깝게 못나오는 형편이다. 출석이 어떻든 수업은 충실하게 진행된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적은 만큼 더 많은 시간을 배당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일까 솜씨가 나아짐이 보인다
. 지난해보다 한 달 늦게 시작해 8월 말까지 수업이고, 9월 중순에 2학기 수업이 이어지게 된다. 코로나19로 인해 영향받지 않은 분야가 어디 있겠는가.


5
시 반에 수업 끝난 후 달샘과 유포리 사과밭을 둘러봤다. 향토지에 수록될 작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원에서 그동안 근화동, 소양동 등 향토지를 발간해 왔고 이번엔 신북읍을 다룬다.

 

신북읍 편엔 내가 그림을 맡았는데, 샘밭 장터, 소양댐과 세월교, 삼한골, 유포리 사과밭이며 마적산 등을 소재로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경우는 다뤄본 적이 없어 생소한 편이다.


인물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 샘밭장터 같은 게 특히 그렇다
. 퇴계동 벽화용으로 장운상화백의 미인도 모사와 김유정 초상을 그리며 애를 먹었었다. 강촌시절 이웃들 초상화를 그려준 일이 돌아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최소한의 기본도 모르고 오로지 본능만으로 해냈다. 50년 전이라 아직도 간직한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수십 년 된 도민증에 흐릿한 증명사진을 보고 그렸다.


그래도 조상님과 똑같다고 가져갔었다
. A4지에 미술연필도 아닌 일반 연필을 사용한 초상화였다.


기억으로는 추곡리
, 광판리에서도 받아갔었다. 강촌역을 이용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냥 해줬으니 몇 점 안된다. 전적으로 인물화에 매달린 것도 아니다. 시간나면 어쩌다 그리던 상황이었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도 안꿨었다. 그러니 열성이 있을 것인가. 베토벤 전기를 읽고 책에 나온 베토벤을 그리고 싶어졌고 비슷하게 나오며 같은 대상을 계속 그리다보니 점점 나아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었다. 그리고 위인전에 나온 밀레의 자화상 소묘를 또 흉내를 내봤다. 이렇게 시작된 거다. 그림 재료라곤 전혀 없었다. 미술연필이 따로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물감은 전혀 다뤄본 적이 없다. 초등시절 크레용과 크레파스를 사용했던 게 고작이다. 중학생이던 형이 수채로 그리는 걸 옆에서 본 것이 전부다. 4학년 때 서예부를 택해 글씨를 썼었다. 특출 나지도 못했다.


인기만화 주인공을 그린 걸 친구들이 보고 학용품과 바꾸는 일이 더러 있었다
. 형이 만화가게를 집에서 했었다. 아버지가 집에서 가승이나 족보를 세필로 쓰시는 걸 무심히 가끔씩 봤었다.


청력상실이 없었다면 화가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 것인가.

 

강촌시절, 옆집에 서울에서 이사 온 분이 있었고, 조선일보를 구독했다. 밀레특별전이 보도되며 밀레의 명작들을 칼라사진으로 볼수 있었다. 비록 사진이었으나 생애 처음으로 명작을 접한 거다.


보고난 후 버리는 신문을 달래서 스크랩까지 했다
. 신문 배달이 안 되면 창촌 배급소까지 가서 얻었다. 728, 9월이다. 그리고 운보 김기창 화백이 나온 여성잡지나 주간지를 보게 됐고,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구체적으로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흐름이 만들어졌다. 목영진화백과 연결되고, 묵촌화실 소헌 선생님으로 이어지며 한국화에 입문한다. 남천화백과도 인연이 닿는다.


살아오며 흐름이 바뀌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 평생을 살아오며 바꾸고자 의도한 일은 없다.


흐름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 올해 들어와서 점점 또 흐름이 바뀌려는 조짐을 느낀다. 무엇이 어떻게 인지는 아직 모호해서 알수 없다. 늘 그래왔듯이 결국은 받아들일 것이다. 최선을 다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