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낸 에세이] 당연한 것 아니라

지소현 승인 2022-07-26 11:51:16


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나는 단체 사진 속 사람이나 텔레비전을 볼 때 쪼그려 앉은 이들에게 시선이 간다. 그리고 양 무릎을 가슴에 대고 두 팔로 감싸 안은 누군가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낀다. 이유는 내가 열 살 이후로는 취해보지 못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결핵균에게 먹혀 흉터만 남기고 사라진 가여운 어린 연골!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이 상체와 하체를 접을 수 있다는 것만큼 편리한 기능이 어디 있을까
. 바닥에 앉아 원하는 반경의 물건을 취할 수도 있고, 신나게 다리를 휘저으며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품을 수도 있고...


나의 오늘이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던 내일이라는 것을 아는가라는 글이 생각난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신체적 기능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공감 가는 글이다. 문득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해야 했던 지난날 상처가 고개를 든다.


오랜 병상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을 때다
. 당장 닥친 어려움은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90도 각도 이상 구부리지 못하는 오른쪽 다리가 생존에 필요한 동작을 어렵게 했다. 지저분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맞대야 했던 배설 자세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집에서는 마음 편했으나 학교에서는 불안의 늪이었다. 무릎을 변소 바닥에 대다가 비틀하면 오물이 가득 찬 아래로 빠질 것 같았다. 그래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쩌다 소변이 마려우면 하교할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불어 오른 아랫배는 감각을 잃었으며 집에 와 배설을 해도 이물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두려움의 장소가 된 화장실! 그렇게 중·고등학교 6년을 견디다 보니 방광이 약해졌다. 생명체로서 기본조차 자유롭지 못한 좌절감은 마음에도 염증을 만들었다. 남몰래 울었던 단발머리 시절, 아예 기억의 저편으로 훌훌 날려버리고 싶다.

 

중학교 때다. 비 오는 날이면 전교 조회를 강당에서 했었다. 설립된 지 3년 남짓한 학교 강당은 그냥 마루였다. 저마다 개인용 방석을 들고 가 깔고 앉았다. 나에게는 그 낮고 낮은 바닥이 높고 높은 산이었다. 발뒤꿈치를 세워 엉덩이를 바친 후 무릎 꿇고 버텨야 했으니까. 양반 자세로 편안해하는 친구들은 딴 세상 사람이었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그날따라 유난히 길었던 조회가 끝났을 때 아픈 다리가 펴지지 않아 얼마나 당황했던가. 낡은 헝겊 인형처럼 너덜거렸다. 저리고 아린 통증보다 친구들에게 가여운 모습을 들키는 것이 싫었다. 마침 벽 쪽에 있었기에 겨우 잡고 일어서서 독립된 개체처럼 감각 없는 발목을 달랬다. 서서히 피가 통하고 다리에 힘이 오르기까지는 모두가 강당을 빠져나간 뒤였다. 넓은 공간 휑한 기운이 나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가.


그 외로움은 한 인간으로서
, 한 여성으로서 살아내는 내내 동반자였다.


발을 씻는 일
, 발톱을 깎는 일, 스스로 양말을 신는 일, 신을 신고 벗는 일 등등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욱 강력한 전사가 되어야 했다. 세탁기 힘을 빌린다고 해도 수돗가에서 걸레라도 빨 때는 온통 젖어야 하는 다리. 엄마로서 수유 자세가 나오지 않아 고군분투했던 미안함. 직장에서 야외로 단합 대회라도 가면 펼쳐놓은 돗자리를 눈치껏 피해야 했던 소외감. 식당 온돌방에서 꼼지락꼼지락 앉은 자세를 뒤척여야 하는 외식 등등...


세상 모든 사람은 저마다 남모르는 고통을 견디며 산다
. 어쩌면 내 아픈 다리보다 더욱 절절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뻐청다리를 만인에게 고백함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신체의 모든 부위를 신이 창조한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당연한 것 아니라 감사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평생 앉아서 사는 사람, 아름다운 색깔이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

 


지금 나는 구부리지 않고도 자유롭게 살고 있다
. 소파가 있고 침대가 있으며 식탁도 있다. 음식점도 테이블 놓은 곳이 늘어난다. 그래서 오랜 세월 위축된 가슴도 서서히 펴지고 있다. 하지만 쪼그려 앉은 사람만 보이는 것을 어찌할까나. 아마도 기괴한 유언을 남길지도 모른다. 나 죽으면 우두둑 다리를 접어서 수의를 입혀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