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마음을 그려낸 에세이] 쓰레기의 변천사

지소현 승인 2022-11-15 11:54:38


지소현 본지 대표, 수필가

 

어린 시절 60, 70년대 농촌에는 쓰레기가 없었다. 음식물 찌꺼기는 개밥그릇에 담아 주거나 소여물 끓이는 가마솥에 부었다. 종이는 찢어서 변소 벽에 걸린 바구니에 담아 두었다. 뒤처리 용도였다. 비닐 비료 부대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한겨울 아이들의 썰매기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탈진 화전에서 비료 부대를 깔고 앉아 내달렸었다. 그리고 장마철에는 우비가 되었다. 거꾸로 펼쳐 들고서 한쪽 귀퉁이를 맞은편 귀퉁이로 밀어 넣으면 거대한 고깔로 변했다. 고깔을 머리에 얹으면 세찬 빗줄기도 두렵지 않았다. 농부들은 그것을 쓰고 삽을 들고 논두렁에 나섰고 아이들은 등굣길에 나섰다. 쓰레기가 쓰레기인 줄 모르고 살던 시절이었다. 가끔 맛보는 비과나 사탕 껍데기는 아궁이에 던져넣었고 헌 달력 같은 두꺼운 종이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즈음 어느 날, 흑백 TV에서 이해할 수 없는 뉴스를 보았다. 도회지 거리에서 담배꽁초를 버리면 경범죄로 벌금을 내게 된다는 것이었다. 발밑에 툭 던지고 비비면 그만인 담배꽁초 아닌가. 낯선 이야기였다.


80
년대 초, 도회지 허름한 주택가에 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그 야이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의 일회용 기저귀, 망가진 플라스틱 장난감, 깡통, 빈 병이 부담스러워졌다. 마당 귀퉁이 가마솥 아궁이에서 불살라 버렸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이 쌓여갔다. 동네 골목길 입구에 커다란 수거함이 생겼다. 악취가 나고 파리 떼들이 득시글거렸으며, 주변을 종횡무진하는 쥐들도 보였다. 쥐들은 마당 수돗가 빨랫비누에 이빨 자국을 선명하게 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비위생적이라는 것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다
. 골목 어귀 쓰레기 수거함이 차면 정기적으로 트럭이 와서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간다고 했다. 그것이 있는 마을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우리 지역 어떤 시장님은 매립장 인근에 사택을 마련하고 이사를 가기도 했다. 주민들과 고통을 함께하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달래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 매립장 주변 주민들의 반발 뉴스도 자주 등장했다. 서서히 쓰레기 문제가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는 도심 환경도 대책이 필요했다
. 버스터미널 공중변소는 오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씹다 뱉은 껌이 얼룩덜룩 기괴한 반점처럼 여기저기 깔려있었다. 그러한 무개념은 대폿집에서도 흔했다. 막걸리를 부어 마시던 빈 잔을 재떨이 대신 쓰는 풍경도 보았으니까.


청결한 나라가 된 것은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덕분이다. 손님맞이 정책 중 위생에 관한 것이 우선이었다. 쓰레기 무단 투입 단속, 길거리 쓸기, 공중화장실 청소, 재활용 분리수거 날도 정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모아 둔 빈 종이상자, 공병 등등을 청소차에 직접 실어 보냈다.


그러한 세월을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자 풍요의 시체처럼 늘어난 쓰레기들! 어느 해인가 부터 종량제 봉투 사용이 시작됐다. 버리는 데도 돈이 들어가는 것이지만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나고 있다. 10여 년 전에 뉴욕에 갔을 때다. 근처 고속도로 갓길 밑, 빗물 흘러가는 홈에 버려진 병, 과자 봉지 조각들이 즐비했다. 진정 세계 제일 선진국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아서 사진까지 찍었던 기억이 난다. 뉴욕의 호텔에서는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려고 했더니 그냥 버려도 된다고 했다. 전문적으로 그 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버릴 것이 있게 마련이다
. 식용 동물 뼈나 곡식 찌꺼기만 버렸던 시절을 지나, 유리병과 플라스틱을 버리기 시작한 시절을 살았고, 온갖 비닐과 스티로폼과 일회용품을 버리는 시대를 맞이했다. 쓰레기 변천사는 인류의 변천사이며 한 국가의 경제 문화 위생의 기록과도 같다. 풍요 속 재앙인 쓰레기와 전쟁하는 지금, 마음까지 쓰레통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