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안 최영식 화백의 바리미 일기] 모란이 피기 까지는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3-05-09 11:27:04


 

*모란이 피기 까지는

 

: 김 영 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어제, 뒤뜰의 모란이 활짝 피어났다. 지난 일주일 동안 봉오리가 부풀어 올랐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 반 개 된 것이 몇 송이 있었기에, 어제 일어나자 바로 모란한테 가보니 열대여섯 송이가 활짝 피어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음은 물론이요. 화단에 활짝 핀 꽃들을 심어 놔도 안보이던 벌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꿀을 빨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잔치 판 같았다. 모두 흰 모란들이다. 예전과는 달리 해마다 벌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질 정도로 현저히 줄어듬을 느끼고 있었기에 모란 꽃 무더기에 몰려든 벌의 집단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직 봉우리도 여럿있어 다 만개하면 더 화려해질 터이다. 모란의 대궁 한 줄기는 좀 크고, 아직 봉오리만 달린 줄기는 작은데, 꽃 무더기는 빈약해 보이는 줄기에 비해 풍성해서 꽃들을 잘 감당할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모란을 달리 부귀화라 했겠는가. 부하고 귀한 티가 역력하다. ‘꽃 중에 왕이란 또 다른 표현이 실감난다.

 

발산초당은 처음엔 초가집으로 지어졌다. 정부에서 화전 정리를 할 때 내 몰려 친척의 땅에 기둥이며 들보, 서가래까지 모두 도끼나 깎귀 등으로 다듬어 세우고 엮었다. 지붕이 낮으니 방안에서 내가 손을 치켜들면 여유있게 천장에 닿는 높이로 낮다. 양기와로 바뀌고도 오래되어 기와의 표면 모래가 드러날 정도다. 다행히 비는 안 샌다. 딸만 여섯을 키운 집이라 한 칸 방을 하나씩 줬다고 들었다. 현재 남은 건 기역 자로 된 6칸이다. 뒤 곁 장독대 있는 곳에도 두 칸이 더 있었으나 헐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한 칸 방 하나에 두 칸 방 두 개, 한 칸 주방으로 구성돼 있다. 처마 쪽으로 지붕을 늘려 마루를 만들고 불투명 유리 샤시문을 마당쪽으로 쭉 둘러 달아놨다. 그러니 마루 쪽 천장은 더 낮으나 머리를 숙이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다만 방문들이 낮아 출입하며 아차하면 더러 머리를 부딛는다. 앞마당, 옆마당은 좁지 않은 공간이 있고 뒤쪽도 작은 텃밭을 만들 공간이 있다.

 

겸손해서 발산초당이란 이름을 붙인 게 아니라 제대로 부합이 된다. 기둥이며 들보며 뼈대는 모두 손작업으로 다듬고 지었으니 반듯함 없는 집이 민속품 같다. 그래도 재목이 튼실해 보이긴 한다. 울타리 없는 바깥마당은 주차장으로 사용하는데 구석에 백여 년 묵은 대추나무가 있다. 80대 중반을 넘어선 송석선생이 어릴 적부터 봐온 대추나무란다. 어린 대추나무도 곁에 있다. 둘 다 대추는 풍성하게 열린다. 대추나무와는 인연이 깊다. 십대 후반 시절 농사 지을 때 밭가에 아람드리에 가까운 큰 대추나무가 있어 밭 일에 지친 몸을 쉬는 정자목 역할을 해줬었다. 그리고 산막골 생활 19, 선운재 앞에 젊은 대추나무가 있어 정이 갔고, 발산리로 나와서도 다시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다. 대문 옆에는 오가피 나무가 기운 왕성하게 서있다. 좁고 긴 뒷마당 끝 쪽엔 장독대가 있다. 이런 낮고 낡은 초당에 백모란은 화사함에도 이외로 잘 어울린다. 40여 송이가 초당을 환하게 밝혀준다.

 

젊은 시절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유난히 애송하며 사랑했었다. 그래선가 답사 중 영랑생가에 들렸을 때 감회가 남달랐었다. 이른 봄이라 화단의 모란은 많았고 빈 나무라 허전했어도 꽃 피었을 때를 상상해보며 정감이 뭉클 솟아났었다. 그럼에도 내가 사는 집 마당에 모란을 품은 것은 발산초당에서가 처음이다. 작년엔 몇 송이 안 피어서 주목받지 않았는데 올해는 자랑스러울 정도다. 모란의 꽃말을 찾아보니 부귀, 영화, 행복한 결혼, 행운, 사랑, 헌신, 여성성, 아름다움, 겸손, 고귀함, 성실 등 꽤나 풍성하다. 꽃 색갈이 다양하기에 더욱 그런 듯 싶다. 초당엔 흰색뿐이어서 더 잘 어울리는 건가 싶다. 붉은 모란이 대표격인데 엄청 화려하다. 예전에 덕수궁을 자주 드나들며 모란이 필 때 보면 각 미술대학이나 중, 고등 미술반도 단체로 나와 모란을 화폭에 담는 모습을 봤었다. 꽃들도 장관이고, 화학도들의 열정도 인상적이었다. 오래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