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복 수필가
▷부산 출생
▷전 강원 중·고등학교 영어교사
▷대한민국 녹조근정훈장
▷2013년 ‘월간 수필문학’ <도보여행>과 <고양이 일기>로 등단
▷전 춘천수필문학회 회장,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수필문학가협회, 강원수필문학회,
강원문인협회, 춘천문인협회에서 동인활동
무슨 과목이 재미있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녀에게 물었더니, 마술이 재미있다고 했다. 마술? 어리둥절했다. 요즘 초등학생의 1학년 과목을 살펴보았다. 국어, 수학, 안전한 생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개 과목이다. ‘4계절’ 이름의 과목이 궁금했다. 알아보았더니 예전의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이 모두 통합된 과목이다. 1학기는 봄 여름에 해당하는 활동을, 2학기는 가을 겨울에 해당하는 활동을 통합으로 배운다. 음악 미술 체육도 ‘4계절’ 과목에 모두 들어 있다고 했다. 마술은 방과 후 활동으로 배우는 취미 과목이다. 생소한 과목의 이름이 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은퇴 후 나는 제일 먼저 대한민국 국립공원의 모든 산을 오르고 싶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옛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퇴직 하루 전날 헬스장에서 마무리 운동을 하다가 벨트에 걸려 넘어졌다.
양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의사는 경사를 피해야 하니 등산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지막한 동산도 안 된다고 했다. 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산행만은 그래도 나의 자부심 같은 취미활동이었는데, 못하게 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은퇴 3개월 만에 너무 심심해 미치겠어!” 식당 옆자리에서 우연히 이 소리를 듣고 나도 그처럼 될까 봐, 근심했다. 그러나 나의 은퇴 후 12년 세월은 심심할 틈도 없이 훅하고 지나갔다. 등산이나 격한 운동은 못해도, 내가 즐겨 할 수 있는 ‘즐거운 인생’ 과목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문화원과 주민센터와 도서관의 취미 프로그램은 초등 1학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과목처럼 다양했다. 사진, 기타, 가곡, 수필, 한국화, 영화감상, 요가, 자서전 집필, 택견 등등에 관심이 갔다. 젊은 날에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공부하러 온 회원들과의 친교의 시간도 즐거웠다. 사진을 찍으며 빛과 구도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기타를 배우면서 반 박치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몇 곡 정도는 코드를 잡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가곡 발표회를 하면서 올라 본 무대의 떨림과 기쁨을 실감했다. 한국화 그림을 배우고 열심히 그려서 여덟 번째 계속 전시회에 참여했다.
문학지에 글을 올리고 있다. 무릎을 아끼라던 의사가 자전거 타기를 권했다. 자전거를 타고 의암호 낭만 호반을 돌면서, 춘천의 풍광에 늘 감탄했다. 감탄하는 정서(情緖)도 능력이라며 내 자신감을 뿜뿜 추켜세웠다.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코로나 때문에 메타버스(metaverse) 인터넷 공간에서 비대면으로 공부했다. 3개월 만에 나의 서른까지의 기억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완성했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여행도 틈틈이 다녔다. 아내와 내가 유일하게 일치하는 취미가 여행이다. 알뜰살뜰 세운 아내의 여행계획에 늘 감탄한다. 여행비도 패키지보다 절반 가까이 절약되어, 남의 나라 풍경과 문화를 우리끼리 오래 머물며 누릴 수 있었다. 덕분에 해외 여행기도 꽤 썼다. 영화도 많이 보았다. 매주 한 번씩 소양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상영하는 시네마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독립영화 김정욱 감독을 이곳에서 만났다. 영화의 촬영기법과 세세한 설명으로 영화 감상법을 상당히 키워주었다.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도서관 홈페이지에 영화감상문을 꼬박꼬박 80여 편을 올렸다. 덕분에 지금 감상문만 읽어도 본 영화가 모두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네마 회장 직분도 맡았다. 해마다 도서관 예산으로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가을소풍을 갔다. 계획을 세우고 인솔 책임자가 되었다.
남양주 영화 촬영소. ‘효자동 이발소’의 촬영지인 서울 종로구 서촌. ‘라디오 스타’의 영월.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를 촬영한 고성과 속초. 모두 만족한 시네마 소풍지였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 선하고 재미있다고 혼자 단정 지었다. 가곡 시간에 배운 노래 중에 끝까지 남는 노래는 ‘오 솔레미오’다. 길을 걷다가도 심심찮게 부르곤 한다. 이탈리아 대표적인 민요를 원어로 불러보니 더 모양이 난다. 나의 1번 애창곡이 되었다. 지나온 열두 해 동안의 나의 즐거운 인생을 주마등처럼 돌려보았다.
내 주변인 중에서 골프가 멋있는 취미로 대세였지만, 돈이 많이 들었다. 또 늦게 배우니 스트레스만 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재미와 관심이었다. 주변을 잘 살피고 찾으면 큰돈 들이지 않고도 만족할만한 거리는 참으로 많다. 어느 교수는 숲에서 새소리와 수목(樹木)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즐겁다고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인생의 사계를 지나는 중에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만의 처지와 시공 속에서 재미와 취미의 깊이를 더해보자. 본인의 삶이 저절로 윤택해질 것이다. 즐거운 인생을 위한 여가활동에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진 않았다.
여행·독서·글쓰기·그림·영화·수다·자전거·산책·노래·기타·사진·블로그·유튜브. 인생의 입동을 맞이하는 내게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매력적인 단어들이다. 이러한 단어들로 융합된 통섭의 의미를 손녀의 교과서 이름으로 요약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나의 남은 〈즐거운 인생〉의 교본 이름이다. 자신의 형편대로 언제 어디서든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다. 행복은 즐거운 인생 속에 꼭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