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소개-④
일상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박영숙의 ‘해롭지 않은 어른’

강원장애인신문사 승인 2023-10-05 12:01:06

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에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함께 진행, 기존 일상부문에 고용부문이 추가됐다.


공모전 결과 이음미 씨의
빙산의 일각일상부문 대상, 박수현 씨의 우리의 삶이 해석되는 순간고용부문 대상 등 총 30개 입상작을 선정해 시상했다.


입상작 중 대상
2, 최우수상 4, 우수상 9편 등 15편을 소개한다. 네 번째는 일상부문 최우수상 수상작인 박영숙의 해롭지 않은 어른이다.

 

해롭지 않은 어른

 

박영숙

 

내 아버지는 해롭지 않은 어른이다. 그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아버지가 사시는 아파트 경비 어르신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경비 어르신 말씀으로는 우리 아버지는 소낙비가 오면 아이들에게 자신의 우산을 빌려주고, 흡연구역의 담배꽁초를 조용히 줍는 아파트에서 가장 해롭지 않은 어른이라고 하셨다. 그 말이 주는 기분 좋은 충격에 경비 어르신의 말을 곱씹어보니, 아버지를 정의하는 단어로 그보다 적합한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아버지가 서른다섯 살일 때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광산 생활을 오래 하신 아버지의 몸과 정신 어느 쪽이 더 빨리 붕괴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신의 환청이 들리고, 환영이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의 붕괴와 더불어 평범했던 우리 가족은 순식간에 시골 마을에서 조심해야 할 가족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80년대만 해도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굉장히 무례한 수준이어서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받을 병원도 찾기가 어려웠고, 생계를 해결할 방법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고된 방황은 나의 사춘기 시절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기도원으로, 정신병원으로, 절로 다니며 자신을 치료하려 애썼다.

 

청소 일을 하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우리를 붙잡고 있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생계를 책임지려 하다 환영과 환청이 심해지면 아버지는 스스로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을 고립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이다. 집안의 식구들이나 이웃들을 공격했다면 우리는 공부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친구도 만들지 못했을 거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입원하고 나면, 며칠씩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미안해하며 오열하셨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또 아버지의 병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자주 입 퇴원을 반복하셨다. 하지만 입 퇴원이 반복되고 아버지에게 맞는 약을 찾아갈수록 우리의 삶은 고요해지고, 방향을 찾아갔다.

 

아버지의 정신질환이 장애로 인정받게 되면서, 우리는 나라가 주는 기초 생활 지원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걸 살라고, 살라고. 나라에서 주는 동아줄이여라고 눈물을 삼키며 표현하셨다. 동아줄은 내가 직장에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아 소득이 생길 때까지 끓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현병을 앓으면서도 본인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버리지 못했다. 깍듯한 존댓말, 격의 없는 태도, 남에게 먼저 나누어주는 습관 등이 우리 아버지를 대표하는 특성이다. 아버지는 가끔 역에 있는 가난한 이를 데려와서 목욕시키고, 자기 패딩을 입혀서 내보내기도 했다. 그때는 그런 행동들이 아버지의 병 때문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아버지 본연이 가진 특성임을 안다.

 

쉽게 베푸는 사람, 베푸는 게 움켜쥐는 것 보다 편한 사람, 그게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조현병은 사납지 않았다.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았다. 가끔 환영이나 환청이 심해지면 아버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셨지만, 우리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진 않으셨다. 조현병도 결국 개인의 특성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 인생 최대의 질문이었다. 삼 남매 중 나와 내 여동생은 간호대학교로 진학해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조현병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평범하고 다정하던 아버지가 붕괴해야 했는지, 세상은 왜 우리를 계속 그런 눈으로 보는 건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공부해도 쉬이 나오는 답이 아니었고 졸업할 무렵 종합병원 취직에 성공한 나는 정신과 병동에 지원했다. 거기서 수많은 조현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병에 대한 인식이 생기기 전에는 조현병의 당사자는 증상 때문에 무너진다. 그리고 병동에 입원해서 약물에 의해 어느 정도 증상이 조절되고 난 후에는 자신 때문에 무너지는 가족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고 나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내가 만난 조현병 환자 대부분은 사납지 않았다. 몸부림치며 나으려고 하는 암 환자들과 교통사고를 당해 일상을 찾으려는 재활 환자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조현병 환자를 포함한 정신장애 환자들은 다른 환자들이 받지 않는 세상의 편견에도 몸을 낮추고, 조심조심 걷는다.

 

나는 병동의 많은 환자에게서 서른여섯 살의 아버지, 마흔의 아버지, 예순의 아버지를 만났다. 조현병이라는 건 다른 병이랑 똑같아서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인생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고에 아버지와 우리가 휘말렸단 것을 오랜 시간의 공부와 직장생활로 인해 깨우치고 받아들였다.

 

병동에서 일하던 시절 정신의학과 교수님이 해주셨던 강의내용이 나의 생 전반을 위로해주는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다. 교수님 말씀은 이랬다.

 

환자들을 오래 공부하게 되면서 배운 건, 마음이 좀 더 보드랍고, 착한 사람들이 더 아프다는 것, 세상의 빠른 흐름과 지배적인 체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조현병과 조울병에 좀 더 취약하다는 것, 그러니 그 병을 대할 때 좀 더 다정해지라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강의가 끝났을 때 나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강의를 듣고 난 후 나는 아버지에게 다정해지기로 했다. 자주 안아드리고,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빈번히 말해주기로 다짐했다. 내가 다정해진다고 아버지의 병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버지의 다정함은 나의 다정함을 만나 꽃을 피웠다. 다정함은 해와 같은 힘이 있어서 아버지의 노년과 나의 중년을 나름 밝게 비추고 있다. 요즘은 아버지의 걸음의 속도에 맞추어 산책하고, 아버지의 어눌한 질문에 느리게 답한다. 아버지가 품는 희망에도 색이 있고 날아갈 수 있다고 응원하기 주저하지 않았다.

 

다정함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사실 내 자신을 가장 많이 위로했다.

 

괜찮다고, 너도 어쩔 수 없었다고, 네 잘못도, 아버지의 잘못도 아니라고. 잘살았다.’라고. 생의 긴 시간 동안 누구도 나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을 나의 다정함이 나에게 속삭여 준다.

 

창밖에는 비가 무섭게 쏟아진다. 올여름 폭우를 걱정하던 기상예보가 틀리지 않을 모양이다, 땅의 모든 것들이 폭우에도 뿌리와 향을 잃지 않고 아버지와 우리 가족처럼, 해롭지 않게 살아남기를 바란다. 나는 해롭지 않은 어른의 딸이다. 그거면 되었다고, 삶을 토닥인다.